
2026년 7월 6일, 워싱턴 D.C. 안에서 같은 거리를 두 행렬이 지나갔다. 한쪽은 메릴랜드 내셔널 하버의 게일로드 리조트에서 출발한 버스 행렬이다. 미국 최대의 친이스라엘 기독교 단체 '이스라엘을 위한 기독교인 연합'(CUFI)의 연례 워싱턴 서밋이 7월 5일부터 7일까지 열렸다. 창립자는 샌안토니오의 대형 교회 목사 ‘존 헤이기’이다. 단체가 스스로 밝히는 회원 수는 1천만 명이다. 이번 무대에는 방송인 글렌 벡과 마크 레빈이 올랐고, 주미 이스라엘 대사 예히엘 라이터가 연단에 섰으며, 네타냐후 총리는 영상으로 인사를 보냈다. 명분은 단순하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축복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한쪽은 200명 남짓의 행렬이다. 아랍인의 상징적 복장 중 하나인 케피예(정사각형의 면직물 천)를 두른 사람과 유대인들의 ‘키파’를 쓴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유모차를 밀고, 보행기를 짚고, 의사당 앞을 지나갔다. 11개 기독교·유대교·이슬람·불교 단체가 모인 '팔레스타인을 위한 초종교 행사'이다. 그들이 펼친 현수막은 미완성이었다. 가자에서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적다가 중단된 천이었다. 이름이 너무 많아 다 적지 못한 것이다. 두 행렬 모두, 손에는 성경이 들려 있었다. 이것이 오늘 미국 기독교의 초상이다.
한 여자가 물려받은 신앙, 그리고 되돌려준 신앙
행렬 속에 해나 색스라는 목사가 있었다. 미국 연합 그리스도교회 소속이다. 그는 복음주의 시온주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가 다니던 교회는 '이스라엘을 위한 기독교인 연합(CUFI)'에 정기적으로 헌금을 보냈다. 어린 시절 그가 배운 문장은 명료했다. 현대 이스라엘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문장을 반납했다. 그리고 지금은 상원 의원실 문을 두드리며 보좌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이스라엘을 위한 기독교인 연합'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건넨 전단에는 더 날 선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마겟돈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온다는 것이다.
같은 성경이다. 같은 창세기, 같은 복음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책에서 무조건적 지지를 읽고, 또 다른 사람들은 같은 책에서 그 지지의 철회를 읽는다.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인가. 이 질문이 지금 미국 교회를 가르고 있다.
문제는 로비가 아니라 시금석이다
서안지구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목사 파레스 아브라함은 이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문제는 ‘CUFI’가 특정 정책을 위해 로비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로비는 합법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지지를 외교 정책의 영역에서 신앙의 시금석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정치적 입장 하나가 신의 뜻으로 승격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군사 원조의 규모, 정착촌 확장의 적법성, 가자의 참상, 팔레스타인인의 처우, 이 모든 것이 더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된다. 검증이 불경이 되는 순간, 신앙은 사유를 잃는다.
그 승격은 하나의 정교한 뭉뚱그림 위에 서 있다. 유대 민족과 성경 속 이스라엘, 1948년에 세워진 국가, 임기가 정해진 현 이스라엘 내각이 하나의 덩어리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같은 게 될 수 없다. 민족은 민족이고, 국가는 국경과 선거와 정당과 군대를 가진 국가이며, 정부는 한시적 연립이다. 정부의 정책은 평가받을 수 있고, 평가받아야 한다.
성경의 예언자들이 그것을 보여 준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침상 앞에 섰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상아 침대를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미워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왕을 향한 침묵은 축복이 아니라 방조다.
창세기 12장의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 시온주의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있다. 창세기 12장,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나 그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바로 이어 말씀하신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너(이스라엘)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종착지는 아브라함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통과해 온 인류에게 가는 것이다. 한 민족에서 끝나는 축복은 절대 아브라함의 축복이 아니다.
기독교 개혁주의 신학은 이 대목에서 단호하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인간의 면책 특권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언약은 은혜이지 면허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어떤 민족도 신성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거기에는 한 국가의 국기가 없었다.
벽에 금이 가고 있다
숫자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한다. 퓨리서치센터가 3월 23일부터 29일까지 미국 성인 3,507명을 조사한 결과, 이스라엘에 부정적 견해를 가진 미국인은 60%였다. 2025년 53%, 2022년 42%였다. "매우 부정적"이라는 응답은 4년 만에 거의 세 배로 늘어 28%가 되었다.
복음주의 백인 개신교인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가장 견고한 지지층이다. 65%가 호의적이다. 그러나 1년 전에는 72%였다. 그리고 연령을 갈라 보면 벽의 금이 드러난다. 50세 미만 백인 복음주의자 중 이스라엘에 부정적인 비율은 50%, 호의적인 비율은 47%다. 처음으로 부정이 긍정을 앞질렀다.
7월 9일 발표된 퓨리서치센터의 또 다른 조사에서는 미국 성인의 62%가 이스라엘 정부에 부정적이었다. 백인 복음주의자는 이스라엘 정부를 과반(57%)이 호의적으로 보는 유일한 종교 집단이었다. 반면 유대계 미국인 중 이스라엘 정부를 호의적으로 보는 비율은 47%에 그쳤다.
여기에서 절대 오해는 없어야 한다
이 수치가 곧 신학적 정당성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여론이 진리를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을 혐오하는 반유대주의는 여전히 실재하는 악이며,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음악 축제장에서 발생한 하마스의 기습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를 상대화하는 어떤 논법도 정당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되는 ‘가자’에서의 끔찍하고 불행한 사태를 뭐라고 부를지에 대해서도 미국인의 3분의 1가량만 '제노사이드(인종학살)'라 답했고, 절반은 판단을 유보했다. 사실 아직 합의된 언어조차 없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오래 강요당해 온 거짓 양자택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의 안전이냐, 팔레스타인의 존엄이냐. 그들은 이제 묻는다. 왜 둘 중 하나여야 하는가.
사라지기 전에 들으라
이 신학적 왜곡의 대가는 추상적이지 않다.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이스라엘에 등록된 종교 간 대화·평화 구축 NGO인 로싱 센터(Rossing Center for Education and Dialogue)는 2025년 한 해에만 성지에서 기독교인과 기독교 재산을 겨냥한 폭력 사건 155건을 기록했다. 가자에서는 교회가 폭격당했고, 서안지구의 교회 지도자들은 정착민 폭력의 격화를 경고해 왔다. 베들레헴, 베이트사후르, 예루살렘, 타이베. 이 지명들은 관광 안내서의 항목이 아니다. 2천 년을 견뎌 온 살아 있는 교회의 주소다. 특히, 이 기록은 아랍인에 의해서가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공개된 기록이라는 면에서 아랍인들을 위한 편향성의 우려에서 벗어난다.
여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하나 있다. 성지를 축복한다는 신학이, 성지의 교회를 지우고 있다. 나는 중동 이슬람권에서 꽤 오래 살았다. 그곳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복음은 무리(국가)나 지도 위의 국경선을 상대하지 않는다. 직접 이름을 부른다. 예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이름으로 부르셨고, 길가에 앉은 눈먼 거지 바디매오를 이름으로 부르셨다.
피닉스의 무대, 그리고 나의 고백
지난겨울, 피닉스에서 열린 기독 청년 대회 ‘어바나 25’에서, 파레스 아브라함은 7천 명의 학생 앞에서 '예수를 믿는 유대인'(Jews for Jesus) 대표 아론 아브람슨과 나란히 무대에 섰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기독교인의 동정을 놓고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걸 두 사람은 몸으로 보여 주었다. 강연이 끝나자, 학생들이 줄을 섰다. 그들은 새로운 적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진실을 말하는 더 신실한 방법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곳의 학생들 줄을 생각하며 부끄러웠다.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시간 동안 나 역시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한 적이 있다. 내 편을 하나님 편이라 부른 적이 있다. 확신은 편안하고 사람을 재워 줄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은 나를 재우지 않고 깨운다. 밤새 뒤척이게 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보라고 말한다.
성경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마태복음 5:9). 화평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노동이다. 문장을 다시 읽고, 확신을 다시 재고, 상대의 눈물을 내 계산표에 넣는, 지루하고 끝없는 노동이다. 이스라엘의 가자 땅에서 죽은 아이들의 이름은 아직 다 적히지 못했다. 지금 그들의 현수막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